일제강점기 제주 바다는 고래 기름을 짜던 식민지 산업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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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 바다는 고래 기름을 짜던 식민지 산업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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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이후 일본 어선들의 제주 바다 침탈이 시작되었고, 이는 전복, 해삼 등 해산물 남획을 넘어 1926년 서귀포에 포경기지가 세워지면서 고래잡이 산업으로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던 제주 돌고래는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제주 바다의 역사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일본 어선들은 전복, 해삼 등을 긁어가던 것을 넘어 총칼을 앞세워 제주 해안을 침범했으며, 이로 인해 제주 바다는 고래를 잡아 기름을 짜내는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1870년대 이후 제주 바다에는 일본 어선들이 상어 포획과 전복, 해삼 채취를 위해 잇따라 출몰했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과 후속 통상 규정은 이러한 움직임에 길을 열어주었고, 이는 제주 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잃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기록은 일본 어선들이 해안을 습격해 가축을 약탈하고 주민을 폭행했으며, 1891년 건입포 앞바다에서는 일본 어선들의 무단 조업을 막으려던 제주 어민들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일본 어민들의 초기 목표는 전복, 해삼, 상어 등 제주 연안의 값비싼 해산물이었습니다. 잠수기선을 이용해 바닥까지 훑는 방식에 해녀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고, 1900년경에는 큰 전복이 사라질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일본 언론은 이러한 상황을 '일본 어민의 금고 보장'이라 표현하며 제주 바다를 자원 창고로 여겼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고래는 산업 자원이라기보다 떠밀려온 고래를 활용하는 정도였으나, 제국주의 일본은 고래 전체를 상품으로 인식했습니다.

1890년대 이후 한반도 연안에서는 일본, 러시아, 영국 자본 간 포경 주도권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근대 포경업은 빠른 기선과 강력한 작살포를 앞세워 바다 풍경을 급격히 바꾸어 놓았으며,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한반도 연안 포경은 사실상 일본의 독점 산업이 되었습니다. 1909년 일본 신문에는 제주 바다에서 돌고래가 많이 잡힌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역 구전으로는 일본 상인이 제주 어민에게 상어와 고래 매입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제주 주민들이 고래를 '바다의 벗'으로 여겨 잡지 않았던 것과 달리, 일본인들은 고래를 상품으로 여기며 빠르게 포획했습니다.

1926년 제주 남단 서귀포에 포경기지가 건설되었습니다. 이는 수십 년간 이어진 어장 침탈과 해산물 남획, 그리고 고래를 자원으로 보는 시선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일본의 '동양포경주식회사'는 제주에 사업소를 개설하고 서귀포항 주변 공유수면 점용권을 확보하여 기지를 확장했습니다. 1927년 첫 허가를 받은 이후 해방 직전까지 2천 평이 넘는 규모를 유지했습니다. 지리적으로 새섬이 외곽 파도를 막아주고 외항 수심이 깊어 포경선 접안에 유리한 서귀포는 고래 하역 및 처리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당시 제주 기지는 울산, 대흑산도, 대청도에 이어 전국 포획량의 11%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습니다. 지금은 관광지로 알려진 이 항구가 당시에는 고래를 자원으로 바꾸는 식민지 산업 현장이었습니다.

주민들의 기억 속 고래공장은 인양장, 해체장, 제유소, 작업소, 기관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거대한 고래는 기계의 힘으로 끌어올려져 가죽과 지방층이 벗겨지고, 제유소에서는 떼어낸 지방을 끓여 기름을 추출했습니다. 이렇게 얻은 고래기름과 고기는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으며, 제주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고래를 해체하면서 흘러나온 피는 바다를 물들이기도 했으며, 해녀들은 고기가 달아나는 것을 이유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서귀포 포경기지는 1933년 11월, 폭풍우로 침몰한 포경선 '이나즈마마루'와 승선원 13명(조선인 4명 포함)의 죽음을 기리는 추도비가 세워졌습니다. 이 비석은 당시 일본 포경선에 조선인 선원들도 하급 노동자로 일하며 가장 위험하고 고된 자리를 맡았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고래공장 내 조선인 노동자들은 '고래 피쟁이'라 불리며 잡일이나 보조 인력으로 일했습니다. 이들은 낮은 임금과 험한 노동 환경에 시달렸지만, 때로는 공장에서 흘러나온 고래고기를 얻어 굶주림을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포획 대상은 대형 고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물자 부족을 겪자, 일제는 돌고래 가죽을 군수용 대체 피혁으로 활용하는 등 돌고래까지 자원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제주 연해에서 59마리까지 포획했던 고래는 급격히 감소하여 1941년 포경 시대를 마무리했지만, 돌고래 포획은 1940년부터 공식 기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식민 권력은 제주 사람들이 '바다의 벗'으로 여기던 돌고래마저 쓸모와 자원으로 계산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제주 바다가 돌고래 서식지로 주목받으며 이들을 지켜야 할 생명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한 세기 전 이곳은 고래를 잡아 기름을 빼내고 조선인 노동자를 가장 낮은 자리로 밀어 넣던 식민지 산업 현장이었습니다. 서귀포항의 추도비는 당시의 식민지 질서와 노동의 위계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지금 제주 돌고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생존 개체 수를 세는 것을 넘어, 사라진 고래들과 그 곁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함께 기억하는 일일 것입니다. 해방 이후 포경산업은 쇠퇴했지만, 고래의 재등장은 역사의 장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 바다는 고래 기름을 짜던 식민지 산업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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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KBS (네이버 많이 본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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