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한가운데 자리한 볼리비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다. 남미에서 내륙국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두 나라뿐이다. 그런데 볼리비아는 처음부터 바다가 없던 나라가 아니었다. 1825년 독립할 당시에는 태평양을 따라 400km가 넘는 해안선과 안토파가스타 같은 항구를 갖고 있었다. 이 바다를 잃게 된 과정에는 비료 원료 ‘초석’을 둘러싼 세금 분쟁, 5년 넘게 이어진 전쟁, 그리고 100년 넘게 이어진 외교·법정 다툼이 얽혀 있다.
사막 밑의 ‘하얀 금’ 초석, 세금 10센타보에서 시작된 갈등
볼리비아의 옛 해안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꼽히는 아타카마 사막 일대다. 19세기 이곳에는 비료와 화약 원료로 쓰인 초석(질산염)이 대량으로 묻혀 있었고, 채굴은 주로 칠레 자본 회사들이 맡았다.
갈등의 불씨는 세금이었다. 볼리비아와 칠레는 1874년 조약에서 볼리비아가 일정 기간 칠레 기업에 대한 세금을 올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1878년 볼리비아가 초석 수출에 1킨탈(약 46kg)당 10센타보의 세금을 새로 매기자, 칠레는 이를 조약 위반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볼리비아가 세금을 내지 않는 회사의 재산을 압류하려 하자, 칠레는 1879년 2월 14일 군대를 보내 항구 도시 안토파가스타를 점령했다.

1879년 태평양 전쟁, 볼리비아가 잃은 땅 약 12만㎢
이렇게 시작된 전쟁이 남미의 태평양 전쟁(1879~1884)이다. 볼리비아와 비밀 동맹을 맺었던 페루도 전쟁에 끌려 들어갔지만, 해군력에서 앞선 칠레가 바다와 사막을 차례로 장악했다. 전쟁이 끝난 뒤 볼리비아는 해안 지방 전체, 약 12만㎢에 이르는 땅을 잃었다. 한반도 남한 면적보다 넓은 규모다.
▶ 2018년 국제사법재판소 판결 당시 보도 (KBS News 공식 유튜브)

1904년 평화우호조약: 바다 대신 받은 철도와 ‘통과권’
1884년 휴전 이후 두 나라는 1904년 10월 20일 평화우호조약을 맺었다. 국제사법재판소(ICJ) 판결문에 정리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2조: 칠레가 점령한 옛 볼리비아 해안 지역은 “절대적이고 영구적으로” 칠레 영토가 된다.
- 제3조: 칠레가 비용을 대 아리카 항구와 라파스 고원을 잇는 철도를 건설한다. 이 철도는 1913년 5월 13일 개통했다.
- 제6조: 칠레는 볼리비아에 자국 영토와 태평양 항구를 통한 “가장 폭넓고 자유로운 상업 통과권”을 영구히 보장한다.
지금도 볼리비아의 수출입 화물 상당수는 칠레 북부 아리카 항을 거친다. 볼리비아 세관 직원이 항구에 상주하고, 볼리비아 화물에는 통과 혜택이 주어진다. 바다를 잃은 대가로 ‘바다로 나가는 길’을 빌려 쓰는 구조인 셈이다.
2018년 국제사법재판소 판결 “칠레에 협상 의무 없다”
볼리비아는 이후에도 주권이 있는 바다 출구를 되찾으려 했다. 2013년 4월에는 칠레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칠레가 과거 여러 차례 협상 의사를 밝혔으니 바다 출구를 주는 협상을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ICJ는 2018년 10월 1일 12 대 3으로 “칠레는 볼리비아에 주권적 태평양 접근권을 협상할 법적 의무를 지지 않았다”고 판결하고 볼리비아의 나머지 청구도 모두 기각했다. 다만 재판부는 두 나라가 선린 정신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까지 막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그리고 ‘바다의 날’
바다를 잃었지만 볼리비아는 지금도 해군(Armada Boliviana)을 운영한다. 해발 약 3,800m에 있는 남미의 대표 호수 티티카카 호수와 아마존 수계의 강들을 무대로 순찰과 수송을 맡는다. 또 매년 3월 23일을 ‘바다의 날(Día del Mar)’로 정해 잃어버린 해안을 기억하는 행사를 연다. 바다를 되찾겠다는 목표는 볼리비아 헌법에도 국가의 권리로 명시돼 있을 만큼 상징성이 크다.

한눈에 정리
- 1825년 독립 당시 볼리비아는 400km 넘는 태평양 해안선 보유
- 1878년 초석 수출세(1킨탈당 10센타보) 분쟁 → 1879년 2월 칠레의 안토파가스타 점령
- 태평양 전쟁(1879~1884) 패배로 해안 지방 약 12만㎢ 상실
- 1904년 평화우호조약: 영토 확정 + 아리카~라파스 철도 + 영구 통과권
- 2018년 ICJ 12 대 3 판결: 칠레에 협상 의무 없음
참고: 국제사법재판소(ICJ) ‘Obligation to Negotiate Access to the Pacific Ocean (Bolivia v. Chile)’ 2018년 10월 1일 판결문·요약문, EJIL:Talk!(2018.10.4), The World(PRX, 2019.3.22). 대표 이미지: KBS 뉴스(2018.10.1 국제사법재판소 판결 보도) 영상 캡처, 태평양 전쟁 지도 Createaccount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영상: KBS News 공식 유튜브.